<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단가는 기본적으로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단가 형식의 기본이다. 따라서 짧은 단어에서 그 느낌을 해석해내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시형이기도 하다.
- <시간이라는 추>에서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 문장에서의 '행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는 식의 영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메시지라는 말은 정말이지 친해지기 힘든 단어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신작 영화를 홍보할 때면 몇 번이나 그런 질문을 되풀이된다. 아, 곤란하다 곤란해... 애초에 내가 이 영화에 메시지란 걸 담았던가.
"시는 메시지가 아니다. 메시지는 의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시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인 다나카와 슌타로 씨는 한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작품에 이야기할 만한 메시지라는 것이 포함돼 있다면, 그것은 만든 사람이 아닌 독자나 관객이 발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내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TV 다큐멘터리로 이 일을 시작한데다, 연기 경험이 별로 없는 모델이나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찍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작가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자유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체념적인 태도, 그리고 그런 부자유스러움을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인다고 나 스스로는 분석한다.
연출론을 깊이 파고들 수 없는 또다른 이유는, 도마 위에 오른 프로그램의 연출이 너무 치졸해, 어찌해도 연출론으로는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노다 마사아키 <상중에>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어린 시절, 아직 집에 냉장고가 없던 때의 일. "아이스크림 먹고 싶네"라는 말이 나오면 어머니에게 50엔을 받아들고 집에서 2분 거리에 위치한 잡화점으로 달려가, 하나에 10엔 하던 컵 아이스크림을 다섯 개 샀습니다. 벌써 40년도 더 된 일이라 컵 색깔이 파란색이었는지 노란색이었는지, 모리나가 표였는지 유키지루시 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손에 쥐었던 10엔짜리 동전의 감촉과, 잡화점 밖에 놓여 있던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열 때의 냉기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쇼난 '지가사키관' 여관
가고시마 명물 '가루칸'
영화 속에 그려진 날의 저날에도 다음날에도 그 사람들이 거기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관을 나온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줄거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고 싶게 하는 묘사. 그 때문에 연출도 각본도 편집도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장에서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무대에서는 그렇게나 가볍게 움직였는데, 대조적으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손이나 발, 눈조차도. 언제 움직이나 하고 가만히 응시했다. 카메라를 정면에 두고 클로즈업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라고 한마디. 그리고 또 히죽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면, 그건 아니다. 모든 것은 사소한 움직임과 움직임의 사이에서 표현된다. 대사와 대사 사이. 움직이기 전에 멈춰 있는 약간의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식으로 당황스러움과 친절함, 유머를 멋지게 나눠 연기한다. 깎아내고 깎아내지만, 그럼에도 정적이지 않다.
(하시즈메 이사오에 대해)
대개 사람들은 화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배우가 영화의 주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주연은 화면에 잡히지 않을 때도 그 영화를 지배하는 사람이다. 좀 멋지지 않은가, 이런 말투. 대체 무엇을 지배하는가 하면, 그것은 영화의 톤이나 리듬이나 템포 등이다. 무슨 리듬이냐면, 대사와 액션과 감정과 때로는 편집의 리듬이다.
소문대로 철도를 좋아했다. 인터뷰어가 전차의 매력에 대해 묻자 그의 한마디.
"나만의 것이 되지 않는 점이에요. 거기에 낭만이 있습니다."
(쿠루리의 기시다 시게루)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영화의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아이를 버린 어머니도 단죄하지 않는다"였다.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라는 게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이클 무어의 자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축제니까 배당금을 걸고 내기 대상으로 삼거나, 영화 평점의 별 개수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즐기는 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레이스'만으로 시야를 좁히면 영화제의 본질을 오인할 수 있다. 우열을 겨룬다는 직선적인 감각은 영화제에 참가하는 나의 마음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사실은 좀더 풍요롭고 복잡한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