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소설>, 미즈무라 미나에
도무지 밑줄을 칠 수 없는 책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소설 속 세계에 흠뻑 빠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미즈무라 미나에와 츠지 구니오의 필담에서 언급된 '청소년기에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축제로서의 책읽기'를 경험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재미있다거나 대단한 스토리텔러라는 생각은 해봤어도 작가가 똑똑하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읽고서는 작가가 아주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 때문인듯하다. 그리고 첫 소설과 두번째 소설, 세번째 소설이 나아가는 방식이 흥미로워서. 책을 미친듯이 읽고 나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보통은 조금 묵혀두는 편. 이 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복선들을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사소설>을 읽고 싶은데, <본격소설>이 2008년 초판 발행 이후 지금까지 초판본이 아주 레어하게 돌아다닌 것을 보면 미즈무라 미나에의 다른 책들이 번역 출간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역시 일본어 읽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순간.
소설이란 사라져간 '시간'을 애도하고, 그럼으로써 지금 사라지고 있는 '시간'을 애도하며 아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한국어판 서문 중
어쩌다가 그 보물상자가 열리면 봉인된 '시간'이 그 혼란스러웠던 시대 고유의 그림자와 소리, 냄새와 더불어 어린 시절의 기억에만 깃드는 최상의 광휘와 함께 눈앞에 둥실 솟아오른다.
일본에서 막 온 일본인은 백화점의 새 포장지로 감싼 것처럼 일본의 공기에 싸여 있는 법인데, 젊은데도 불구하고 지친 인상의 이 남자는 이미 정신이 이국의 어딘가에 침식되기 시작한 듯했다.
도쿄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걷거나 레스토랑에 들어가거나 할 때마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용모들이 수려해졌구나, 저러면서 머리까지 절망적으로 텅 비어 있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하고 늘 내가 감탄하거나 저주하는 일본의 젊은 남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 뵌 적이 있었던가요?
- 아뇨.
남자는 조금 수줍어하면서 웃었다.
거기에는 젊은은 있었지만 뻔뻔함은 없었다.
유스케는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 일본이 멀어져버렸어요.
유스케가 갑자기 말을 이었다.
- 미즈무라 선생님 책을 읽었습니다.
- 네.
- 두 권 다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 저는 대단히...
잠시 말을 찾다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가장 무난한 표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자동적으로 되풀이했다. 남자가 내 소설에 관심이 있어서 온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찾아오기까지 했으면 조금 더 자세한 말을 하는 것이 소설을 쓴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인사가 아닐까.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내 소설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잠시나마 불만을 느꼈던 것도 잊고, 그가 요즘 일본문학에 흥미가 없다는 것, 즉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새로운 소설가들의 이름을 늘어놓아 나의 무지함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할 우려가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일본 소설가뿐만 아니라 비서양 언어로 글을 쓰는 다른 소설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시도는 일본 근대문학의 큰 흐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큰 흐름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멀리서부터 '도쿄온도'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