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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르의 시나리오와 영화에서 대사의 비중은 자주 언급된다. 로메르는 대사를 흥미진진하고 영화적이라고 간주하며, 대사를 쓰는 것이 시나리오를 위한 시발점이 되는 개념을 찾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한다. 

(피오나 핸디사이드 서문)




늘 영화에 관심이 있었나요?

아뇨,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아주 늦게, 학생 시절에야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영화를 멸시했고 좋아하지 않았어요. 독서와 미술,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서는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죠. 연극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보러 간 적도 많지 않아요. 라신, 코르네유, 몰리에르 같은 프랑스 고전 희곡을 좋아했지만 보는 것보다 읽는 것을 좋아했죠. 영화는 시네마테크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무성영화들을 좋아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지만 단지 극장에 가는 것만으로 영화를 발견한 건 아니었어요. 



두 여자 사이에서 주저하는 남자라는 개념이 '도덕 시리즈'의 모든 영화들 간의 연결 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자는 사실 주저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그가 선택을 하고 마음을 먹은 바로 그 순간, 다른 여자가 등장해버린 겁니다. 어떤 종류의 갈등도 실제로는 없고, 그런 상황은 남자의 선택을 확고하게 해줄 뿐이에요. 일례로 <수집가>에서 남자는 단지 여자와 일주일을 지낸 후 떠납니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도 남자에게는 모험일 뿐, 한 여자와 다른 여자 사이에서 주저하지는 않아요. 만약 그가 모드와 관계를 맺었다면 일주일 지속된 후 끝났을 겁니다. 내 최근작에서도 주인공의 선택은 이미 끝났고 그는 결혼을 할 겁니다. 그가 모험을 즐긴다면 그건 모험 외에 아무것도 아닌 거죠. 


이 연작을 시작할 때 소재에 대해 정확한 개념들을 갖고 있었나요?

네, 오랫동안 마음속에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고, 연작을 시작했을 때 각 '이야기conte'의 주제가 뭐가 될지 알고 있었죠. 그러나 발전시키지 않은 상태였고, 아직 극히 희미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무엇보다 주안점을 둔 것은 검정과 하양, 빛과 그림자 사이의 대비를 탐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컬러란 모름지기 영화에 뭔가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흑백을 선호해요.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흑백은 일종의 기조, 통일성을 부여하며, 이는 컬러를 잘못 쓰는 것보다 영화에 훨씬 더 유용하거든요. 



'도덕 이야기'에서 '도덕'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는 뭔가요?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번역되기 힘든 '모럴리스트 moraliste 인간성을 탐구하는 사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럴(도덕/교훈)'이라는 말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모럴리스트'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을 의미해요. 마음 상태와 느낌에 관심을 갖죠. 예를 들어 18세기 파스칼이 모럴리스트였습니다. 특별히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 라브뤼에르나 라로슈푸코 같은 사람들을 일컬어 모럴리스트라고 하고, 스탈당 또한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묘사하므로 모럴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하지만 '모럴'은 또한 그들이 자신의 행동 동기, 이유들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들을 분석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 자체보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예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언어의 문제도 있어요. 난 대화, 스타일, 음질, 억양에 많은 중점을 두고 그것은 매우 중요해요. 프랑스어는 내 영화들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난 작가이기도 하며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작가로서 프랑스어는 내게 중요해요. 뭔가를 쓴 후에 다른 누군가에게 번역을 맡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영화의 저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난 프랑스에서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또 다른 예로 히치콕 같은 미국 감독들을 존경하지만 그들에게서 실제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만약 영향을 받았다면 그건 상당히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존경하는지는 말할 수 있으나, 영향력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각자의 반응은 유일하고 개인적이며 서로 달라야 합니다. 난 관객들이 서로 너무 가까이 앉지 않고 극장이 너무 꽉 차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모를 때 영화를 더 잘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각자 상이한 반응을 하게 되요. 그것이 획일화된 반응이 일어나는 극장보다 낫습니다. 난 대중과 함께 내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모두 같은 지점에서 웃으면 고통스러워요. 그렇게 작정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내가 단지 모두를 동시에 웃기려고 뭔가를 쓴 건 아니라는 거죠. 누군가 미소 짓는 건 괜찮지만 영화의 정확하게 똑같은 데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아마 내 영화들이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독서와 더 유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대 위의 뭔가를 보는 것보다 책처럼 읽히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죠. 그래서 집단적인 반응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어떤 소재가 관객에게 가장 어필할지를 계속 자문하는 대신, 동일한 소재를 여섯 번 다루는 것이 최선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죠. 여섯 번째가 되면 관객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나는 여전히 10년 전 나 자신을 위해 계획했던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해지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한 가지 아이디어를 계속 고집하면 결국 지지자들이 생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심지어 배급사조차도...... 독립된 한 편의 시나리오보다는 여섯 편으로 구성된 연작의 시나리오를 문제 삼거나 비판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내 작업은 연극과 같은 다른 형식의 엔터테인먼트보다는 소설(현재 영화가 바통을 이어받은 특정한 어떤 고전 스타일의 소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게 그것은 큰 의미가 있어요. 나는 영화가 이미 연극에서부터 나아간 것보다도 더 멀리 영화를 끌고 가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캐릭터들이 말이 많을지 모르지만 연극이 성립되려면 대사만으로는 안 돼요. 내 캐릭터들은 전혀 연극 속의 인물들처럼 말하지 않아요.(적어도 그들이 그렇지 않기를 바라죠.)



왜 '도덕 이야기'의 편수를 한정하셨나요?

일단 이야기 연작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것이 어디에선가 끝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에드거 앨런 포가 '기이한 이야기의 남자'로 회자되는 의미로 내가 '도덕 이야기의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판타지, 스릴러, 역사 소설도 쓸 수 있어요.(그리고 언젠가 원하면 만들 겁니다.) '도덕 이야기'는 내게 하나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주제의 변주인 거죠. 



계속해서 <수집자>의 보이스오프 장면들을 보면, 아드리앵이 매우 형식적인 18세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 반면 대사는 항상 매우 현대적인 스타일을 띠죠. 사고와 말 사이의 이분법을 암시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요?

...그러나 이분법은 확실히 의도된 겁니다. 옳든 그르든 나는 톤에서 그런 차이가 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프레임워크는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감독님이 선택한 것 이외의 세팅에서 인물들을 상상할 수는 없거든요. 인물들과 세팅을 절대 분리하지 않으시더군요. 

정확하게 그래요. 그리고 네스토르 알멘드로스의 카메라워크가 인물들을 풍경과 연결하는 데 크게 기여하죠. 윤곽(아웃라인)보다는 형상을 부각하는 것과(모델링) 더 관련이 많은 카메라워크 유형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빛을 사용하는 화가들, 대상들 각각을 고립시키기보다는 빛에 빠뜨리는 화가들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대상을 분리하고 에워싸고 일종의 독립체로 만들어버리는 초현실주의적 트릭을 싫어해요. 내가 선호하는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터너 혹은 세잔입니다. 



그녀(주주)는 자신의 개인적인 색을 더했고, 바로 이런 점, 즉 존재하는 것들과 우리가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조립하는 것이 영화에서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에요. 



그들은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로워지려고 시도하지 않아요. 개인과 사회 간에 마찰이 없어요. 갈등은 오히려 캐릭터의 자유와 그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규칙 사이에 더 존재합니다. 프레데리크(<하오의 연정>에 등장하는 남편)은 좋은 남편이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클로에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고. 어떤 사회라도 원칙(그것이 무엇이든)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소재는 유효합니다.



"로메르는 손쉬운 아름다움을 피하면서도 모든 숏이 아름답기를 원한다"



내 최근 영화들과 아마 심지어 첫 영화에서도 캐릭터들이 자신이 사는 장소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들은 스스로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그곳을 좋아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압니다. <비행사의 아내>의 경우가 그렇고, 폴린느와 루이즈도 마찬가지예요. 이는 유동성과 고정성 간의 갈등입니다.



안정과 불안정, 부동과 변화가 있습니다. <만원의 밤>의 루이즈는 어느 순간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내 차기작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로 떠나고 싶어 할 거예요. 그녀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녹색 광선>의 여주인공이 염소자리라는 사실은 그녀 스스로에게 매우 중요하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의 '파란 시간l'heure bleue' 섹션은 점성술보다는 기상학에 더 많이 기대고 있고요. 그리고 <만월의 밤>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를 영화에서 일종의 게임으로 보시는지, 아니면 정말로 감독님의 존재론적 관점의 일부인지요? '에리크 로메르는 가벼운 영화를 만들 때조차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세계관, 우주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만한 사실을 담보한다'라는 의미인가요?

상당히 복잡한 문제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질문하셨으니 답할 수 있겠네요. 점성술을 그다지 믿지 않아요. 그것은 내 영화들에서 18세기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교적 초자연성과 유사한 역할을 합니다. ... 그러나 동시에 나는 게임에서처럼 초월성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요. 별이라는 테마를 내가 사용하는 방식은 이와 같죠. 그것을 믿지는 않지만 회의적이지도 않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믿는 바를 내가 믿지는 않더라도.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럴 욕망이 있고, 심지어 가장 최근 영화에서도 내가 원하는 바의 한계점까지 가봤습니다. 



그러나 흑백의 결정은 클레르몽페랑과 그곳 하면 떠오른 뭔가와 관련이 있어요. 클레르몽페랑은 검은 도시이며, 그 검정은 컬러필름을 사용했다면 노랗거나 보라로 보였을 겁니다. 나는 또한 영상에 일종의 얀세니즘적(인간의 구원이 개인의 선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은총과 선택으로만 가능하다는 엄격한 가톨릭 교리) 특징인 단순함을 부여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컬러의 디테일에 빠져 길을 잃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한 영화 안에는 어느 정도 통일된 색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통일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영화가 연극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어요. 연극에서는 완벽한 조화, 극도로 조화로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부수적인 색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어떤 부조화도 없이 너무 완벽하면 지나치게 인공적이 돼버려요. 



이 영화는 다소 삽화적인 구성을 띱니다. 이야기 한편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고, 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야기들이 굴러갑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요. 심지어 이고르가 도착할 때도 영화는 진정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나중에야 제공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영화가 하나의 긴 전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인 도입, 전개, 결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아요. 내 예전 영화들을 포함해서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각 액션의 조각이 다른 조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나는 약간 다른 무엇인가를 시도했고, 그것이 조금 지나쳐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런 점이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에요. ... 나는 지나치게 빨리 소재로 진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이미지와 스크린상의 역동성의 관점에서, 침실에서 끝낼 수는 없었고 밖으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점이 또한 약간의 음악이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해요. 끝났다는 신호가 되는 것이죠. 



내가 '도덕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때 '희극과 격언'에 속하는 몇 편이 잉태 중이었음을 아실 겁니다. 실제로 그것들을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요. 마찬가지로, '희극과 격언'을 만들던 중에 '사계절 이야기'의 일부를 구상했습니다. 나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면에서 안티테제를 통해 전개해나가는 것을 좋아해요. 예를 들어 <겨울 이야기>를 위해서는 <봄 이야기>의 이야기와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한 남자와 세 여자 대신, 한 여자와 세 남자)이면서 동시에 <녹색 광선>의 이야기에도 반대되는 이야기를 희미하게 구상했습니다. 왜냐하면 <녹색 광선>에서는 한 여자가 남자를 못 찾는 모양새인데, 여기서는 한 여자가 세 남자 중 못 골라서 문제거든요. 그 후 1980년대 초반 BBC가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본 후, 사랑받는 여인의 귀환으로 내용을 혼동해서 기억하고 있었죠. .. 바로 그때 사랑받던 남자의 귀환을 영화화하고, 그것을 셰익스피어를 참조하여 '겨울 이야기'라고 부르겠다는 생각을 했죠. '겨울 이야기'라는 아이디어가 생기고 나자 '사계절 이야기'라고 부를 연작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따라서 <봄 이야기>를 구상하기 전에 <겨울 이야기>를 생각해낸 셈이지만 당시에는 그걸 언급하지 않았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막상스, 로이크, 심지어 펠리시조차 감동적이면서 비정하고, 짜증나면서도 사랑스럽습니다. 

내 아리스토텔레스적 측면이죠! 비극의 인물들은 전적으로 선하거나 전적으로 악해서도, 전적으로 유죄이거나 전적으로 무죄여서도 안 돼요. 예를 들어 위대한 할리우드 서부극들은 이 고전적 드라마트루기의 법칙을 준수했습니다.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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