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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기획자

주제없음 2016 / 2016. 6. 26. 16:56

지금 화가 났다. 왜 화가 났을까. 정체불명의 전시포스터는 지난주부터 학교에서 봤다. 아는 작가 이름 하나, 아는 이론과 이름 두 개. 동양화 수업이라도 함께 들었나 싶을 정도로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이름들의 나열이었다. 그런데 또 전시 장소는 유명작가의 작업실이다.

의문에 불과했던 것이 일종의 분노로 바뀌게 된 이유는 오늘 페이스북에서 본 그 전시의 설명 때문이다. "작가와 기획자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듯한 흐름 속에서"라는 말이 첫 번째 분노의 포인트였고, "아리송한 위치의 7인"이라는 표현이 두 번째 포인트였다.

일단 작가와 기획자 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도 아니고, "모호해지는 듯한" "흐름 속에서"라는 말 자체가 너무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그래 책임을 유보하는 말투는 그냥 귀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너무 쉽게 작가와 기획자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화가 난다. 이건 지난 오월 교내에서 있던 전시에서도 나를 분노하게 했던 지점인데 그걸 그냥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

경계를 무너뜨리는 게 싫은 이유는 잘 생각해보니 나의 "작가주의"의 폭발이다. 작업은 매순간 하나하나의 선택들에 의해 탄생한다. (탄생이란 말이 과하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작가주의 폭발이니까 그냥 쓰기로 한다.) 그 선택들은 작가의 미학적 결정들이고 미술언어이다. 물론 고민 끝에 자기 언어로서의 결정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처럼 보이는 것을 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좀 tricky하다. 하지만 이런 결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이 기쁨이고 감상자의 역할이라 생각하는데. 기획자는 소위 일반 감상자보다 더 미세하게 알아보고 기뻐하고 보다 넓은 맥락에서 작가를, 작업을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를, 작업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하나의 결정들이 기획자의 '작업'이다. 그것이 기획자의 언어일 것.

터프하게 말하자면, 작가는 전시에 '작업'으로 '기여'한다. 기획자는 기획으로 기여해라. 왜 이름을 포스터에 작가랑 똑같이 박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거야?

이런 맥락에서 7인이나 되는 기획자는, 작업을 내놓지 않았으면 무얼 내놓았느냐는 것. 어떻게 "아리송한 위치의 7인"이라 퉁치냐는 것. 어떻게 자기 위치를 찾지 못하고 전시를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전시는 가볍지 않다. 긴 작업의 과정에서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는 것이다. 전시의 순간엔 과정이라는 변명이 없다. 어찌되었든 전시를 한다는 결정을 했다는 것은 일시적이나마 어떤 완결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상태를 보여주고 그 상태에서 일종의 판단도 받는다. 아리송한 위치 같은 거에서 전시를 하는 작가란 없다. (있기야 있겠지만 어쨌든 자기 쪽팔림도 모르는 사람을 뭐 어떻게 하겠는가....)

작가 한 명 데려다 두 명이 엎혀가는 것도 열받았는데, 한 명에 7인이나 묻어가는 건 너무 하지 않나. 정말.
이용하지 말자
관행처럼 아무렇지 않게 답습하는 것 진짜 하지 말자


그리고 오늘의 사이다: 나의 옛스승이랄까 하는 페인터의 페이스북 글.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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