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y, lucky, you're so lucky, Mister Auster
얄팍한 취향/얄팍한 / 2010. 4. 2. 06:51
PARIS, Porte de Versailles, 30 March 2010.
Salon du Livre.
마음은 제법 단단히 먹고 있었다. 내가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명을 잃게 될까 매우 두려웠지만, 아니 그토록 두려웠기 때문에 그를 만나기 전에 더욱 마음을 딱딱하게 만들어 놓으려고 노력했다.
폴 오스터.
그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고 그의 작품들도 (이름만)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이 사랑받고 있는 존재는 어쩐지 거북했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는 그의 작품을 전혀 접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는 드라마 <온에어>에서 김하늘이 재수없는 기자를 한방 먹일 때 언급된 작가이고 책이 엄청 잘 팔리는 미국 소설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때, 하고 싶은 일이라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것뿐이었던 여름에 <빵굽는 타자기>를 읽었다. 사실 딱히 읽고 싶어서 읽은 건 아니었다. 그때의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고 단지 서점에 가서 책을 살 돈이 없어서 집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읽던 중이었으니까. (불과 1년 반 전인데 지금 읽으니 아주 웃긴 포스팅도 썼다 → 클릭) 책은 재미있었고 폴 오스터는 나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겼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함께.)
언제적 사진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날의 오스터의 사진은 여느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겼다. 그 얼굴에 익숙해져서인지 지하철 무가지에서 그의 최근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랐었다. 그대로 늙으셨지만 그래도 늙으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 사진을 보고 나서 한달 정도 지나 그의 실물은 본다. 십여 명의 사진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다. 앉을 의자가 없어 무대 앞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오스터를 살펴본다. 편해보이지만 격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 셔츠와 스웨터를 입은 그의 인상은 생각했던 대로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까지 걱정할 건 또 뭔가 하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든다. 지금, 모든 것이 밝혀졌다고 믿는 지금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빵굽는 타자기>는 좋았지만 그의 본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소설을 내가 읽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반년 정도나 더 지나서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작가들의 수필이나 자서전 등을 읽고 난 뒤에 그들의 소설을 읽으면 거의 매번 힘이 빠졌기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듯 하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빵굽는 타자기>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리고는 <The Brooklyn Follies>를 읽었다.
그 소설은 밑줄 치고 싶은 문장 투성이었고 나는 폴 오스터가 '같은 세계'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또 그후 일년 간 오스터 휴기를 가졌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또 어째서인지 그를 열심히 찾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폴 오스터의 책을, 영어로 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컸다. 애초에 보유 장서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다가 영어로 된 소설은 정말 별로 없는 도서관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Moon Palace>를 읽으며 영문학을 생각했다. 폴 오스터라면, 그의 작품을 공부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폴 오스터의 작품을 더욱 더 많이 읽고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시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폴 오스터"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는 지금,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 참 소설 같은 걸.
막이 열리듯 기자들이 사라지자 무대 위에는 폴 오스터와 살만 루시디, 각각의 통역가와 사회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사람의 얼굴이 주는 인상과 그 사람 자체와의 관계성에 대해서 나는 아직 일정하고도 확실한 경향을 찾지 못했기에 폴 오스터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까지, 그의 표정이 변하기까지 숨죽여 기다린다.
그의 표정은 경이로울 정도로 변하지 않는다. 사진에 찍힌 모습 그대로 미간에는 주름이 살짝 잡혀있고 커다란 눈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객석은 전혀 바라보지 않는다. 객석 쪽을 보기는 하지만 개개인을 살펴보지는 않는다. 말은 어눌한 편이다. 혀가 조금 짧은 듯한 발음에, 보통의 미국인답지 않게 천천히 차근차근 말한다. 언어를, 단어를 그냥 쏟아내지 않는다.
그는 도시를 좋아한다. "Simply because I live in the city. I am a city person. I spent most of my life in New York and some part of my life in Paris, but mostly in New York. I'm a man of stones, concretes, and city streets. And I'm fascinated by the cities that I keep writing about it."
소설에 팝문화를 넣는 것에 대한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Above all this is that a novelist must be open to everything, he must never reject any part of human life, in order to write stories. And part of our life is movies, part of our life is pop music, part of our life is sports, and these things all have been part of my life, I would be, it would be an idiot not to be able to incorporate these things to my works, so I've done with passion over the years. But I don't think of it as typing in pop culture into my book. It's part of my inner being. It's just important to me just as the greatest works of literature."
브룩클린에 살고 뉴욕 메츠를 좋아하는 폴 오스터는 맨하탄에 살며 뉴욕 양키즈를 좋아하는 살만 루시디에게 "I just love losers"라고 말한다.
서사. 음악과 춤에서 멀어진 시는 "loses its force". 서사(storytelling)에서 지나치게 멀어진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도 펜과 "my old" 타자기로 글을 쓰고, 팩스를 가지고 있다.
살만 루시디의 "기술이 이 시대만큼 빠르게, 많이 변화한 적이 없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바꾸었다."라는 류의 발언에 대해-자신은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며 한 말들.
기술은 발전하고 시대에 따라 인간은 변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있고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우리는 모두 죽는다. 우리는 분노와 질투, 사랑, 혐오, 기쁨을 느낀다. 이 감정들은 많은 변화 속에서도 "the essence of human life"로 변하지 않는다.
그는 폴 오스터였다. 나는 폴 오스터처럼 입고 말하고 보고 생각하는 폴 오스터를 만났다. 대담이 끝난 후 긴 줄에 잠시 고민하다가 가까이에서 그가 사인을 하는 것만 보고서 돌아섰다. 아쉬움에 Actes Sud에 가서 그의 책을 만지작대다가 그곳에서도 사인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얼마 간의 고민 끝에 줄을 섰다. 그 고민은 '그에게서 사인을 받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 라는 외형을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에 알게 될 수 있는 사람의 사소한 됨됨이를 보고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또는 (이석원에게 수없이 많이 당한) 무엇인가를 그에게 말했을 때에 감정적으로 거절되었다는 기분을 느낄까 하는 염려였다.
짧고 명료하며 인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나의 진심을 말할 것.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은 사인을 받을 때에 한마디라도 건네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채워진다.
"Mr. Auster, I am thinking about majoring in English Literature because of you."
그의 책을 단 세 권, 소설로는 단 두 권 읽은 내가 말한다. 간단한 사인을 마친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 사진과 똑같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모습으로. 마지막 세 단어를 말할 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본다. 눈썹은 조금 올라가고 눈은 조금 더 커졌다.
"Where?"
"In grad school, next year."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폴 오스터에게 선언했다. 나는 내년에 영문학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다.
"Where? Where? Where, in America? Here?"
그는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화가 난 것도 같은 목소리로 빠르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Here, in Paris."
"Oh, I see. Well, good luck."
두텁고 부드러우며 무엇보다도 따뜻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마음을 담아 악수를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똑바로 지속적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지만 그 시선은 결코 차갑거나 낯설지 않고,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을 하는 사람.
자, 나는 내년에 파리에서 대학원을 갈 수 있을까.
Posted by
hamag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