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시작한지 이틀째, 오전 11시에 출근을 했다. ㄷㅁㄷ 알바를 그만둔 후 1년 반 동안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해본 적이 없어 (노동은커녕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장시간 서서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제는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줄곧 서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발과 다리가 여전히 부어 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무척 뜨거웠고 희망 없이 무거운 날씨에 힘이 쭉 빠지고 있었다. 게다가 손님도 별로 없어 시간도 느릿느릿 흐르는 점심 시간이었다.
두 시쯤이었을까. "어 쟤 유명한 애 오네." 라는 매니저의 말에 밖으로 눈을 돌리자 pete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 챙이 있는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Pete다!!"라고 외치고 말았고 매니저에게 "제발 그러지 좀 마"라는 핀잔을 들었다. 가게 벽 면에 붙은 자리에 일행들과 자리를 잡은 pete을 훔쳐 보며 집에 있는 자루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우연히 pete가 파리에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여서 공연을 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매우 아쉬웠다. 그 공연이 바로 어제였는데 이렇게 직접 본인을 보게 되니 흥분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pete가 가게에 왔다는 사실을 자루에게 알리고 최대한 티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내가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열심히 했다. 다행히 기회가 왔고 떨리는 마음을 숨기려 애쓰며 프로페셔널하게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vous parlez anglais?"
bonjour, 하고 눈을 마주치고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서 곧장 pete가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할 줄 알지 ;) 나도 영어가 더 편해! 게다가 너와 편하게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응?)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하자 "아 그렇구나."하며 싱긋 또 웃는다.
"음... 그럼... 먼저 우리에게 물을 줘. still mineral water. 우리 세 명이 마실 수 있게 물 세 개를 줘."
"물? (수돗물을 마시진 않을 거 같으니까) 어떤 물?"
"음... 글쎄... 그냥 아무거나 still mineral water로 해줘."
"아... 그래 네가 선호하는 물이 있니?"
(개구쟁이처럼 짓궂게 웃으며) "너네 highlands 있니?"
"아하하 그건 없어." (그러고 보니까 pete 고향이 hexham이더라.)
"하하 그럼 evian?"
"아 미안해. evian도 없어. 우리는 vittel이 있는데 그건 어떠니? (사실 vittel밖에 없는데;)"
"그래그래 아무거나 괜찮아. 우리 셋이 마실 수 있게 세 개로 해줘. 그리고 맥주를 줘."
"맥주? 어떤 맥주?"
"아... 그냥... 맥주..."
"생맥주로?"
"응 그래 생맥주로. 그리고 레모네이드도 한 잔 줘."
"그럼 물 세 개에 맥주 하나, 레모네이드 하나."
"응 그래 맞았어. 음 밥은... 이거 닭으로 할까."
"닭? 닭으로..."
"아... 홍합... 홍합이 있네... 홍합... do you think I can have it with the mussels as well?" (꽤 dreamy한 목소리로 mussels라고 말했다.)
(오잉 이건 무슨 소리?) "음... 네 말은 닭고기랑 홍합이랑 같이 먹고 싶다는 거니?"
"아... 아니. 아니야. 아... 여기 해산물 모듬이 있네... 음... 이걸 먹겠어."
"해산물 모듬? 그럼 닭고기 말고 해산물 모듬으로 할래?"
"응. 그렇게 해줘."
주문을 하는 내내 계속 눈을 맞추며 얘기를 했다. 사람 눈을 보며 말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사람이 말할 때에 계속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맞장구를 치며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잘 웃고 미소짓으며 약간 중얼 거리듯 꿈꾸는 듯 말을 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뭔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마냥 dreamy한.
가까이서 본 pete는 생각보다 나이가 들긴 했다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동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쨌든 아주 약간의 주름이랄까 그런 것도 있고 조금 지쳐보이는 기색도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점 투성이에 떡진 앞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신도 곳곳에 있었는데 팔이나 손목 근처에 있는 것들보다 오른쪽 목에 있는 문신이 자꾸 눈에 띄였다. (아마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서 인 듯.) "나 사실은 너의 팬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왠지 매니저에게 혼날 것만 같아서 주문을 받고 돌아섰다.
그 후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음료를 챙기느라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pete가 들어왔다. 가까이 서 보니 pete는 키가 무척 컸다. 그의 얼굴이 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어서 올려다 보아야만 했다. 처음에 그는 주춤하면서 내게 "do you have feu?"라고 했다. feu 발음을 좀 특이하게 했는데 마치 fé처럼 들려서 알아듣지 못했다. 어째서 영어로 말하다가 그것만 불어로 말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내가 못 알아듣자 "fire"이라고 하며 담배를 흔들어 보이며 라이터를 켜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라이터를 찾았지만 도통 어디에 있는지 있기나 한지 알 수가 없었고 가게 안 홀에는 나뿐이어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주방에 물어보니 주방 안에 가스불은 있다며 농담을 하셨다. 그 말을 바보같이 pete에게 전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들어와서 매니저의 라이터를 빌려주고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키에 놀랐다. (지금 찾아보니 188cm란다.) 다만 뱃살이 좀 있어서 아저씨 혹은 아기 같은 느낌이었다. 펄럭이는 티셔츠 사이로 둥그런 뱃살의 실루엣이 살짝살짝 보이는 게 귀여웠달까.
그리고 난 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덕분에 전식도 본식도 내가 내갈 수 있었는데 pete가 조금 어린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같이 온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식사를 하지 않고 파인애플만 먹고 나머지 한 명은 식사를 시켰는데, 파인애플이 나오자 pete가 보고 "와..."하면서 깜짝 놀라며 감탄을 했다. 그리고 전식을 나머지 한 명에게 먼저 서빙하고 pete에게 나중에 주었는데 샐쭉하니 가만히 있다가 자신에게도 그릇을 놓아주자 안도하는 듯 표정을 풀고 기뻐했다. 본식이 내갔을 때도 "와..."하며 감탄하는 게 귀여웠다.
나는 pete가 온 후로 홀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전력으로 일을 했다. 팬인 것이 티날까봐 지나다니면서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몇 번인가 그쪽을 보았을 때마다 (손님이 필요한 것이 없나 확인하는 차원으로...-_-) pete와 눈이 마주쳐 좀 부끄러웠다. pete은 눈을 마주치며 아주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언젠가 한 번은 해산물을 양손으로 들고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았다.
pete은 순식간에 식사를 해치우고 가게에 온지 한 시간 정도만에 가버렸다. 갈 때 일어나서 걸어가면서 vittel을 병째 들고 마시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갔다. 가면서 또 눈을 맞추며 "merci, au revoir"라고 말하고 설렁설렁 걸어갔다.
아쉬워하는 자루를 위해ㅡ라고 말하지만 에헴ㅡ스토커처럼 vittel 병과 그가 피운 lucky strike 꽁초를 주워왔다. 저녁에 보러 간 charlotte gainsbourg 공연 입구에서 그 vittel 병을 지키느라 잠시 긴장한 일도 있었다.
* 7월 9일의 뉴스: 피트 도허티, 8일 니스 공연을 펑크 내고 프랑스 병원에 입원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