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삼주 동안 주말마다 광주에 갔다. 총 열 개의 공연을 보았고, 다시 광주에 가면 덜 헤맬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헤맸다.
로메오 카스텔루치 - 봄의 제전
차이밍량 - 떠돌이개 in 광주
아피찻퐁 위타세라쿤 - 열병의 방
브랫 베일리 - 맥베스
김성환/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 - 피나는 노력으로 한
브랫 베일리- B전시
아자데 샤미리 - 다마스커스
클로드 레지 - 실내
호추니엔 - 만 마리의 호랑이
오카다 토시키 - 야구에 축복을
가능하다면 하나씩 짤막하게라도 감상평?같은 걸 남기고 싶은데, 일단은 가장 강렬했던 브랫 베일리의 B전시부터.
B전시- 브랫 베일리
영어와 아주 짧은 한국어를 하는 흑인 여성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입장한다. 지하에는 넓고 하얀 방이 있다. 중앙에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앞으로는 접이식 의자가 줄지어 있다. 의자 위에는 숫자가 써 있는 코팅지가 놓여있다. 내가 선택한 의자에는 26번이 있었다. 안내하시는 분은 다시금 영어로 전시 설명을 한 뒤에, 어색하지만 명확한 한국어로 규칙을 말해주었다. 자신의 번호가 불리면 한 명씩 관람을 시작한다. 번호는 다시 의자에 놓고 가야 한다. 전시장에서는 사진 촬영이 안되고 조용히 해달라. 이것은 전시이기 때문에 뒷사람이 오더라도 본인의 속도로 관람하면 된다.
번호는 순서대로 불리지 않았다. 26번은 네다섯 번째에 호명되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첫번째 퍼포머가 있었다.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2초를 채 버티지 못했다. 힘겹게 2초 간 눈을 마주하고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웬지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첫번째 퍼포머가 특히나 눈빛이 강렬했고 또 그를 둘러싼 고전 회화의 배경 같은 프레임이 이상하게도 감옥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가장 불편했던 것 같다.
전시에는 실제 사람과 그 주변을 둘러싼 여러 장치들, 캡션이 있었는데 어느 퍼포머든 간에 눈을 똑바로 마주쳤기 때문에 주변의 것들이 잠시나마 그 불편함을 피할 수 있는 장치가 되주었다. 하지만 캡션에 써 있는 내용은 대개 매우 끔찍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캡션을 읽고서 다시 퍼포머를 보게 되면 더욱 불편하고 민망할 따름이었다. 나체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퍼포머와 found objet로 명명된 퍼포머 두 명은 정말 감정을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컨퍼런스홀 무대 뒤에 있던 ‘표본’ 역할의 두 퍼포머는 특히 쳐다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다른 공간보다 협소하여 퍼포머들과 나와의 거리가 1.5m 정도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또한 그 중 남자 퍼포머는 너무도 사람처럼 눈을 자주 깜빡이고 발을 살짝 움직이곤 해서 더욱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found objet 두 명은 자로 된 판넬 옆에 서 있었는데, 그 판넬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그 퍼포머들에 대한 실제 내용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사실인줄 알고 기분이 묘했다. 다른 퍼포머들은 과거에 있었던 인종차별의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표본화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전시는 역사적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지만 ‘전시’ 또는 ‘공연’이란 명목 하에 내가 “어찌되었든” 흑인인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끔 했다. 또한 이곳이 한국이기에 나는 덜 타자화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당히 기묘한 일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표본이 되었던 것은 흑인들만이 아닌데, 관람객들은 거의 모두 동양인이다. 만약 이 전시에 황인 퍼포머를 넣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퍼포머들의 사진과 실명, 이 전시에 참여하게 된 이유나 본인의 생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읽으면서 전시 방식과 나의 시선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 같은 걸 찾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것을 위안 삼아도 되었던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전시가 아시아예술극장 개관페스티벌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이라는 말은 확실했던 것 같다. 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개관페스티벌의 몇몇 작품들과 비슷했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충격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점 때문에 뻔하거나 지루해지는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