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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에 예매를 해서 두 달 간 나름 기대하며 기다린 공연. 
charlotte는 <수면의 과학>을 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배우였다. 그가 말할 때의 입모양이라든가 목소리, 발음 같은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노래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서 들어 본 5:55에는 괜찮다고 느낀 곡이 한두 곡 있었고 목소리가 매력적이란 생각을 했다.

우리가 파리에 도착한 겨울, fnac에 charlotte의 신보가 깔렸다. 그래서 신보를 냈다는 것은 그때부터 알았지만 이것저것 행정적인 일에 cd를 사거나 다른 방법으로 음악을 찾아서 들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파리 공연 소식을 듣고 무작정 예매를 했다. charlotte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집중을 했던 탓인지 공연을 예매하고도 앨범을 찾아 듣거나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어긋남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charlotte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들은 두 곡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곡을 들을 생각을 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아님 이 모든 말이 그저 변명일 뿐인지도. 

어찌 되었든 새로운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랄까 그런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 앨범이 전ㅡ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곳에 있었다. 요새 꽤나 '트렌디'한 듯 한, 가사와 멜로디를 반복하며 모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북유럽풍ㅡ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는ㅡ사운드를 자랑하는 음악. 난 그게 싫다. 일단 노래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나로서는 잘 알기가 어렵다. 그리고 화려하고 꽉 찬 사운드이긴 하지만 계속적인 (멜로디와 가사의) 반복을 함으로써 감정을 고조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장르의 음악이라 하더라도 잘 만든 음악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charlotte가 한 시간 여 동안 부른 십 여개의 곡은 서로를 잘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이 곡과 저 곡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었고 방금 들었는데도 기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애매한 느낌이 지루함을 자아냈다. 


2. 
charlotte의 태도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발관의 공연에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merci" 또는 "merci beaucoup" 외에 정말 아무 멘트도 하지 않는 charlotte를 보며 황당했다. 물론 라이브로 듣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지만 실상 나에겐 전혀 의미가 없는 공연이었다. charlotte를 실물로 본다는 것만으로 대만족인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ㅡ많이 있겠지만ㅡ난 그걸로 부족한 것 같다. 내가 사람을 실제로 보러 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말버릇이나 습관이 있는지 알고 싶다. 사운드 면에서 라이브 공연이 앨범을 이길 방법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을 공연에서 보여주지 않는다면 공연을 보러 가는데에 흥미 없다. 

그 점에서 charlotte는 완전 실격. 정말 전혀 과장 하는 것 없이,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와 세션 소개하는 것 (물론 파트와 이름만 말했다)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8시 공연이라고 써놓고 오프닝 밴드 공연을 8시 20분까지 한 뒤 관객을 30분 넘게 기다리게 한 후에 등장했다. 그리고 나서 딱 1시간 공연하고 쏙 들어가셨다. 물론 앵콜을 청해 두 곡을 부르긴 했지만, 뭐랄까 이건 뭐하는 사람? 라는 생각이 드는 공연이었다. 


3.
몽마르트 근처 la cigale은 제법 다양한 공연을 많이 하는 공연장이다. 프랑스에서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이라 모든 공연장이 다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어컨이 없다. 낮 최고기온 35도인 요즘 날씨에 냉방이 전ㅡ혀 안 되는 공연장이라니. "역시 파리야 ^^" 땀이 주륵주륵 흐르고 사람들은 공연 보는 내내 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인의 위생에 대해 다시금 놀라기도 했다. 밀폐된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땀을 흘리다 보니 갖가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각종 암내, place d'italie역에서 나던 냄새, 찌린내, 그리고 미국에서 체육시간에 락커룸에서 항상 "도대체 뭔 냄새지?"라고 궁금해 했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냄새. (지금 내린 결론은 '오랫동안 안 씻은 냄새'.) 정말 여름에 파리에서 공연장을 가는 건 할 짓이 아닌 거 같다. 


4.
그리고 charlotte는 그렇게 공연을 하고 나서 "아 정말 난 수고했어. 관객과 소통했어. 우린 정말 공연을 잘 했어."라고 설마 생각할까 싶었다. 자신의 음악을 한다고 느끼기는 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어릴 때는 아버지 음악에 목소리를 빌려주고 지금은 벡과 같이 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도 벡의 곡을 그냥 노래한 것 같은 느낌이다. 계피냐. (no offense à 계피.)


5.
가게에서 pete의 vittel 병을 좋다고 가지고 와서 있는데 공연장을 들어가기 전에 "병은 안 된다"고 저지 당했다. 병을 버리라는 말에 굉장히 당황한 나는 "안돼. 이건 안돼." 울상이 되었고 자루는 "이건.. 이건 특별한 병이야."라며 설명을 하려 했다. 그러자 안전요원? 아저씨는 자신이 보관해주겠다며 갑자기 벽을 열어서 병을 넣어 주었다. (정말 벽을 막 열었는데 무슨 용도의 공간인지 모르겠다. 딱히 무엇인가를 보관하는 곳도 아닌 것 같고 ㅋㅋ) 

공연을 다 보고 땀범벅이 된 채 나오면서 "그 아저씨를 찾아야 되는데"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내 등에 손을 대 뒤돌아 보았더니 그 아저씨였다. 초진지한 표정으로 아저씨가 하는 말: c'est moi. je vous ai cherché partout. (나야. 너희를 찾으려고 모든 곳을 찾아 헤맸어.) 그러더니 다시 벽을 열어 우리의 vittel 병을 주었다. 그 아저씨가 없으면 어쩌나, 그 아저씨가 우릴 기억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셨다. 프랑스에서 단 한 번도 그렇게까지 말해본 적이 없는데 너무 재미있고 고마워서 "merci beaucoup"라고 말했다. 




그나마 가장 분명한 멜로디가 있는, 그나마 사람들이 알고 호응한 노래
heaven can wait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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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시작한지 이틀째, 오전 11시에 출근을 했다. ㄷㅁㄷ 알바를 그만둔 후 1년 반 동안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해본 적이 없어 (노동은커녕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장시간 서서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제는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줄곧 서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발과 다리가 여전히 부어 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무척 뜨거웠고 희망 없이 무거운 날씨에 힘이 쭉 빠지고 있었다. 게다가 손님도 별로 없어 시간도 느릿느릿 흐르는 점심 시간이었다.

두 시쯤이었을까. "어 쟤 유명한 애 오네." 라는 매니저의 말에 밖으로 눈을 돌리자 pete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 챙이 있는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Pete다!!"라고 외치고 말았고 매니저에게 "제발 그러지 좀 마"라는 핀잔을 들었다. 가게 벽 면에 붙은 자리에 일행들과 자리를 잡은 pete을 훔쳐 보며 집에 있는 자루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우연히 pete가 파리에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여서 공연을 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매우 아쉬웠다. 그 공연이 바로 어제였는데 이렇게 직접 본인을 보게 되니 흥분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pete가 가게에 왔다는 사실을 자루에게 알리고 최대한 티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내가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열심히 했다. 다행히 기회가 왔고 떨리는 마음을 숨기려 애쓰며 프로페셔널하게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vous parlez anglais?"
bonjour, 하고 눈을 마주치고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서 곧장 pete가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할 줄 알지 ;) 나도 영어가 더 편해! 게다가 너와 편하게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응?)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하자 "아 그렇구나."하며 싱긋 또 웃는다. 
"음... 그럼... 먼저 우리에게 물을 줘. still mineral water. 우리 세 명이 마실 수 있게 물 세 개를 줘."
"물? (수돗물을 마시진 않을 거 같으니까) 어떤 물?"
"음... 글쎄... 그냥 아무거나 still mineral water로 해줘."
"아... 그래 네가 선호하는 물이 있니?"
(개구쟁이처럼 짓궂게 웃으며) "너네 highlands 있니?"
"아하하 그건 없어." (그러고 보니까 pete 고향이 hexham이더라.)
"하하 그럼 evian?"
"아 미안해. evian도 없어. 우리는 vittel이 있는데 그건 어떠니? (사실 vittel밖에 없는데;)"
"그래그래 아무거나 괜찮아. 우리 셋이 마실 수 있게 세 개로 해줘. 그리고 맥주를 줘."
"맥주? 어떤 맥주?"
"아... 그냥... 맥주..."
"생맥주로?"
"응 그래 생맥주로. 그리고 레모네이드도 한 잔 줘."
"그럼 물 세 개에 맥주 하나, 레모네이드 하나."
"응 그래 맞았어. 음 밥은... 이거 닭으로 할까."
"닭? 닭으로..."
"아... 홍합... 홍합이 있네... 홍합... do you think I can have it with the mussels as well?" (꽤 dreamy한 목소리로 mussels라고 말했다.)
(오잉 이건 무슨 소리?) "음... 네 말은 닭고기랑 홍합이랑 같이 먹고 싶다는 거니?"
"아... 아니. 아니야. 아... 여기 해산물 모듬이 있네... 음... 이걸 먹겠어."
"해산물 모듬? 그럼 닭고기 말고 해산물 모듬으로 할래?"
"응. 그렇게 해줘."

주문을 하는 내내 계속 눈을 맞추며 얘기를 했다. 사람 눈을 보며 말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사람이 말할 때에 계속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맞장구를 치며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잘 웃고 미소짓으며 약간 중얼 거리듯 꿈꾸는 듯 말을 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뭔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마냥 dreamy한.

가까이서 본 pete는 생각보다 나이가 들긴 했다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동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쨌든 아주 약간의 주름이랄까 그런 것도 있고 조금 지쳐보이는 기색도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점 투성이에 떡진 앞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신도 곳곳에 있었는데 팔이나 손목 근처에 있는 것들보다 오른쪽 목에 있는 문신이 자꾸 눈에 띄였다. (아마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서 인 듯.) "나 사실은 너의 팬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왠지 매니저에게 혼날 것만 같아서 주문을 받고 돌아섰다.

그 후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음료를 챙기느라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pete가 들어왔다. 가까이 서 보니 pete는 키가 무척 컸다. 그의 얼굴이 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어서 올려다 보아야만 했다. 처음에 그는 주춤하면서 내게 "do you have feu?"라고 했다. feu 발음을 좀 특이하게 했는데 마치 fé처럼 들려서 알아듣지 못했다. 어째서 영어로 말하다가 그것만 불어로 말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내가 못 알아듣자 "fire"이라고 하며 담배를 흔들어 보이며 라이터를 켜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라이터를 찾았지만 도통 어디에 있는지 있기나 한지 알 수가 없었고 가게 안 홀에는 나뿐이어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주방에 물어보니 주방 안에 가스불은 있다며 농담을 하셨다. 그 말을 바보같이 pete에게 전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들어와서 매니저의 라이터를 빌려주고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키에 놀랐다. (지금 찾아보니 188cm란다.) 다만 뱃살이 좀 있어서 아저씨 혹은 아기 같은 느낌이었다. 펄럭이는 티셔츠 사이로 둥그런 뱃살의 실루엣이 살짝살짝 보이는 게 귀여웠달까. 

그리고 난 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덕분에 전식도 본식도 내가 내갈 수 있었는데 pete가 조금 어린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같이 온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식사를 하지 않고 파인애플만 먹고 나머지 한 명은 식사를 시켰는데, 파인애플이 나오자 pete가 보고 "와..."하면서 깜짝 놀라며 감탄을 했다. 그리고 전식을 나머지 한 명에게 먼저 서빙하고 pete에게 나중에 주었는데 샐쭉하니 가만히 있다가 자신에게도 그릇을 놓아주자 안도하는 듯 표정을 풀고 기뻐했다. 본식이 내갔을 때도 "와..."하며 감탄하는 게 귀여웠다. 

나는 pete가 온 후로 홀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전력으로 일을 했다. 팬인 것이 티날까봐 지나다니면서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몇 번인가 그쪽을 보았을 때마다 (손님이 필요한 것이 없나 확인하는 차원으로...-_-) pete와 눈이 마주쳐 좀 부끄러웠다. pete은 눈을 마주치며 아주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언젠가 한 번은 해산물을 양손으로 들고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았다. 

pete은 순식간에 식사를 해치우고 가게에 온지 한 시간 정도만에 가버렸다. 갈 때 일어나서 걸어가면서 vittel을 병째 들고 마시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갔다. 가면서 또 눈을 맞추며 "merci, au revoir"라고 말하고 설렁설렁 걸어갔다. 

아쉬워하는 자루를 위해ㅡ라고 말하지만 에헴ㅡ스토커처럼 vittel 병과 그가 피운 lucky strike 꽁초를 주워왔다. 저녁에 보러 간 charlotte gainsbourg 공연 입구에서 그 vittel 병을 지키느라 잠시 긴장한 일도 있었다. 

* 7월 9일의 뉴스: 피트 도허티, 8일 니스 공연을 펑크 내고 프랑스 병원에 입원 당했다.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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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Porte de Versailles, 30 March 2010.
Salon du Livre.

마음은 제법 단단히 먹고 있었다. 내가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명을 잃게 될까 매우 두려웠지만, 아니 그토록 두려웠기 때문에 그를 만나기 전에 더욱 마음을 딱딱하게 만들어 놓으려고 노력했다.

폴 오스터. 
그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고 그의 작품들도 (이름만)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이 사랑받고 있는 존재는 어쩐지 거북했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는 그의 작품을 전혀 접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는 드라마 <온에어>에서 김하늘이 재수없는 기자를 한방 먹일 때 언급된 작가이고 책이 엄청 잘 팔리는 미국 소설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때, 하고 싶은 일이라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것뿐이었던 여름에 <빵굽는 타자기>를 읽었다. 사실 딱히 읽고 싶어서 읽은 건 아니었다. 그때의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고 단지 서점에 가서 책을 살 돈이 없어서 집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읽던 중이었으니까. (불과 1년 반 전인데 지금 읽으니 아주 웃긴 포스팅도 썼다 → 클릭) 책은 재미있었고 폴 오스터는 나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겼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함께.)

언제적 사진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날의 오스터의 사진은 여느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겼다. 그 얼굴에 익숙해져서인지 지하철 무가지에서 그의 최근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랐었다. 그대로 늙으셨지만 그래도 늙으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 사진을 보고 나서 한달 정도 지나 그의 실물은 본다. 십여 명의 사진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다. 앉을 의자가 없어 무대 앞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오스터를 살펴본다. 편해보이지만 격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 셔츠와 스웨터를 입은 그의 인상은 생각했던 대로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까지 걱정할 건 또 뭔가 하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든다. 지금, 모든 것이 밝혀졌다고 믿는 지금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빵굽는 타자기>는 좋았지만 그의 본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소설을 내가 읽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반년 정도나 더 지나서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작가들의 수필이나 자서전 등을 읽고 난 뒤에 그들의 소설을 읽으면 거의 매번 힘이 빠졌기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듯 하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빵굽는 타자기>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리고는 <The Brooklyn Follies>를 읽었다. 

그 소설은 밑줄 치고 싶은 문장 투성이었고 나는 폴 오스터가 '같은 세계'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또 그후 일년 간 오스터 휴기를 가졌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또 어째서인지 그를 열심히 찾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폴 오스터의 책을, 영어로 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컸다. 애초에 보유 장서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다가 영어로 된 소설은 정말 별로 없는 도서관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Moon Palace>를 읽으며 영문학을 생각했다. 폴 오스터라면, 그의 작품을 공부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폴 오스터의 작품을 더욱 더 많이 읽고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시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폴 오스터"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는 지금,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 참 소설 같은 걸.

막이 열리듯 기자들이 사라지자 무대 위에는 폴 오스터와 살만 루시디, 각각의 통역가와 사회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사람의 얼굴이 주는 인상과 그 사람 자체와의 관계성에 대해서 나는 아직 일정하고도 확실한 경향을 찾지 못했기에 폴 오스터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까지, 그의 표정이 변하기까지 숨죽여 기다린다.

그의 표정은 경이로울 정도로 변하지 않는다. 사진에 찍힌 모습 그대로 미간에는 주름이 살짝 잡혀있고 커다란 눈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객석은 전혀 바라보지 않는다. 객석 쪽을 보기는 하지만 개개인을 살펴보지는 않는다. 말은 어눌한 편이다. 혀가 조금 짧은 듯한 발음에, 보통의 미국인답지 않게 천천히 차근차근 말한다. 언어를, 단어를 그냥 쏟아내지 않는다. 

그는 도시를 좋아한다. "Simply because I live in the city. I am a city person. I spent most of my life in New York and some part of my life in Paris, but mostly in New York. I'm a man of stones, concretes, and city streets. And I'm fascinated by the cities that I keep writing about it."

소설에 팝문화를 넣는 것에 대한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Above all this is that a novelist must be open to everything, he must never reject any part of human life, in order to write stories. And part of our life is movies, part of our life is pop music, part of our life is sports, and these things all have been part of my life, I would be, it would be an idiot not to be able to incorporate these things to my works, so I've done with passion over the years. But I don't think of it as typing in pop culture into my book. It's part of my inner being. It's just important to me just as the greatest works of literature."

브룩클린에 살고 뉴욕 메츠를 좋아하는 폴 오스터는 맨하탄에 살며 뉴욕 양키즈를 좋아하는 살만 루시디에게 "I just love losers"라고 말한다. 

서사. 음악과 춤에서 멀어진 시는 "loses its force". 서사(storytelling)에서 지나치게 멀어진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도 펜과 "my old" 타자기로 글을 쓰고, 팩스를 가지고 있다.

살만 루시디의 "기술이 이 시대만큼 빠르게, 많이 변화한 적이 없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바꾸었다."라는 류의 발언에 대해-자신은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며 한 말들. 

기술은 발전하고 시대에 따라 인간은 변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있고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우리는 모두 죽는다. 우리는 분노와 질투, 사랑, 혐오, 기쁨을 느낀다. 이 감정들은 많은 변화 속에서도 "the essence of human life"로 변하지 않는다. 

그는 폴 오스터였다. 나는 폴 오스터처럼 입고 말하고 보고 생각하는 폴 오스터를 만났다. 대담이 끝난 후 긴 줄에 잠시 고민하다가 가까이에서 그가 사인을 하는 것만 보고서 돌아섰다. 아쉬움에 Actes Sud에 가서 그의 책을 만지작대다가 그곳에서도 사인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얼마 간의 고민 끝에 줄을 섰다. 그 고민은 '그에게서 사인을 받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 라는 외형을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에 알게 될 수 있는 사람의 사소한 됨됨이를 보고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또는 (이석원에게 수없이 많이 당한) 무엇인가를 그에게 말했을 때에 감정적으로 거절되었다는 기분을 느낄까 하는 염려였다. 

짧고 명료하며 인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나의 진심을 말할 것.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은 사인을 받을 때에 한마디라도 건네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채워진다. 

"Mr. Auster, I am thinking about majoring in English Literature because of you."
그의 책을 단 세 권, 소설로는 단 두 권 읽은 내가 말한다. 간단한 사인을 마친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 사진과 똑같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모습으로. 마지막 세 단어를 말할 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본다. 눈썹은 조금 올라가고 눈은 조금 더 커졌다.
"Where?"
"In grad school, next year."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폴 오스터에게 선언했다. 나는 내년에 영문학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다.
"Where? Where? Where, in America? Here?"
그는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화가 난 것도 같은 목소리로 빠르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Here, in Paris."
"Oh, I see. Well, good luck."
두텁고 부드러우며 무엇보다도 따뜻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마음을 담아 악수를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똑바로 지속적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지만 그 시선은 결코 차갑거나 낯설지 않고,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을 하는 사람. 

자, 나는 내년에 파리에서 대학원을 갈 수 있을까.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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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rhythm, voice, lyrics, melody, sound
how could one ask for more?




I time every journey to bump into you, accidentally
I charm you and tell you of the boys I hate
All the girls I hate
All the words I hate
All the clothes I hate
How I'll never be anything I hate
You smile, mention something that you like
or How you'd have a happy life if you did the things you like
- the dark of the matinee


It's always better on holiday
So much better on holiday
That's why we only work when
We need the money
- jacqueline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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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가 있고
따뜻한 물이 설정한 온도대로 펑펑 바로, 지속적으로 나오고
오븐이 있고
조리대가 넓고
가스 혹은 전기 레인지가 4개 정도 있으며
성능이 좋고 소음이 없는 냉장고가 있고
재봉틀이 있고
빛이 잘 들고 환풍이 잘되는 큰 창문이 있는 집.
이건 희망사항.


write, draw, film, photograph
both in english and french
출판, 전시, 살롱.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고
영화와 책, 드라마, 그림, 사진, 전시 등을 보고 
모든 것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며
건강하게 사는 것.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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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étoile

주제없음 2009 / 2009. 9. 22. 00:04
나를 위해서 선별하여 간직하고 반복해서 보고 들을ㅡ영화 음악 책 그림 사진 건물
매우 신중하게 골라서 나를 둘러 싸는 거야.
쓸모 없는 쭉정이들은 골라 내어 버리고 가볍게 알짜배기와 사는 거지.


다시 볼 만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Posted by hama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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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린다. 지겹다. 지루하다. 지친다. 


이런 말을 내뱉으려면 먼저 일정한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속속들이 잘 알게 된 후 정도가 되어야 저렇게 말하게 된다. 슬프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다. 마음을 애써 유지시키려 할지라도 결국은 황홀경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의 길이에 따라 주게 된 정(情)과 그 익숙함을 생각하며 얼마간의 의리를 지키는 관계로 변화한다. 


어느 날 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안타깝다 아쉽다 생각하면서도 나에게서 빠져 흘러버리는 것들을 마냥 지켜만 보게 된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흘러가버리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내일을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어쩐지 지금의 마음으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울 듯이 반짝이는 것들이 있다. 이미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것. 


오늘도 그의 책을 읽다가 그의 음악을 듣다가 너와 마주 앉아 있다가 나직이 중얼대본다. 
당신의 판타지 안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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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ㅡ실제적으로ㅡ정리하고 검증하는 데 반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자폐적이 되거나, 외부 세계를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오로지 시간적인 문제였다. 다시 한 번 자신을 제대로 회복하고, 재정비하기 위한 순수한 물리적인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개미집 흙가루로 쌓은 둑같이 연약하면서도 거대한(혹은 이 거대한 모래성 같은) 개미무덤 같은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찾는 것은 그다지 곤란한 직업이 아니다. 물론 그 일의 종류며 내용에 대해서 군소리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일감의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았고, 들어오는 일감은 닥치는 대로 떠맡았다. 마감 날짜를 어긴 적이 없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글씨도 깨끗했다. 일솜씨도 꼼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당하게 할 일도 성실하게 했고, 대가가 낮아도 싫은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더욱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도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


이발소를 나서서, 나는 다시 로비로 돌아와 자, 이제부터 무엇을 하지, 하고 생각했다. 겨우 사십오 분이 소비되었을 뿐이었다.


느낀 일은 굉장히 구체적인데도, 막상 그것을 말로 하려면 그런 구체성 같은 것이 자꾸자꾸 엷어져 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하루에 열다섯 곳이나 레스토랑이며 요리집을 돌고, 내놓는 요리를 한 입씩 먹어보고, 나머지는 전부 남겨놓는 일. 그런 것이 어딘가 결정적으로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해.


하지만 결국 그는 나에게(그리고 나는 그에게) '이미 지나쳐 버린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내가 그를 거기에 밀어넣은 건 아니다. 그가 스스로 거기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고, 그 두 갈래 길은 여간해선 교차하지 않는 것이다. 그뿐이었다.


그가 제법 우아한 손놀림으로 가스버너에 불을 켜면, 다들 올림픽 개회식이라도 보는 눈매로 그를 보곤 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건 누구 한 사람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기는 자네의 세계야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버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는 중에 돌연 잠이 찾아왔다. 무대의 암전 같은 일순의 급격한 잠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다. 타인에게 좋은 얼굴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포스가 당신과 함께 있기를


그는 잘 생기고 인상이 좋을 뿐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학생 운동에 관련되어 어쩌고저쩌고 라든지, 애인을 임신시킨 채 버리고 어쩌고저쩌고 라는 퍽도 진부한 상처였는데 그런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때때로 그러한 회상이 원숭이가 점토를 벽에 던지는 것처럼 엉성하게 삽입되곤 했다.


그 아이는 가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혼자 씹고 있었다. 나에겐 단 한 개도 권하지 않았다. 나는 별로 껌 따위는 씹고 싶지 않았지만, 의례적으로 한 번쯤은 권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분은 들었다.


정말 좋은 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렇겠지


모두들 그것을 도피라고 불러. 하지만 뭐 그건 그걸로 상관없어.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무엇을 구하느냐만 명백하다면, 너는 너 좋을 대로 살면 되는 거야. 남이 뭐라고 하건 알 게 뭐야. 그런 녀석들은 왕악어에게 먹혀 죽으라지. 나는 예전에, 너만한 나이에 그렇게 생각했었어.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건 어쩌면 내가 인간적으로 성장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내가 영원히 옳은 것인지도 몰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 쉽게 해답이 나오지 않거든.


하지만 어째서 일부러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다들 제멋대로 저 좋은 걸 먹고 살면 되지 않아. 안 그래? 어째서 타인에게 음식점 지시까지 일일이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 메뉴의 선택법까지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러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로선 잘 알 수가 없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혼한 후에도 아무 말도 없었다. 극히 상징적으로밖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언제나 상징적인 어투로만 이야기했다.


완고하지는 않아요. 내게는 내 나름의 생각 시스템이라는 게 있을 뿐이에요.


유키는 자기 한 사람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일만으로도 벅찬 것이다. 자신 주변 사람들의 감정까지 일일이 살펴가며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만큼의 여유가 없다. 그리고 그 결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그럼으로써 타인을 통해 스스로도 상처를 입는다.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사태 진행을 차례로 더듬어보고, 그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썩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한 번 더 똑같은 입장에 놓인다 할지라도, 나는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이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따금 두려워지는 때가 있어요. 자신의 존재가 위태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토록 압도적이에요.


이 사람과 결합하면 나는 언젠가는 후회하게 되리라, 하지만 결합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리라고 말이에요.


암시적인 침묵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암시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암시의 암시성이라는 것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암시성이 현실의 형태를 띠기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있게 된다. 페인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고, 잠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양키즈와 오리온즈의 시합이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시합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쩐지 텔레비전을 켜두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 현실적인 것과 이어져 있다는 표시로.


"다행이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다행이군요'라는 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그밖에는 무엇 하나 긍정적인 언어 표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고, 또 침묵이 부적당하다는 위기적 상황일 경우로 한정되어 있다.


혼자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물론 유키와 함께 있는 게 싫었던 건 아니어씾만, 그와는 상관없이, 혼자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누구와 상의할 필요도 없고, 실패해도 누구에게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 있으면 혼자 농담을 하고 혼자 킥킥거리며 웃으면 되었다. 아무도 '그런 농담은 시시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지루하면 재떨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가만히 재떨이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도 '왜 재떨이 따위를 바라보고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자네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취향을 따지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 거기서는 '취향이 좋은 사람'이란 '성격이 비뚤어진 가난뱅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야. 동정받을 뿐이지.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아.


어쨌든 유미요시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지금이라도 곧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로 날아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고, 데이터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보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의 질투를 간파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평범함이란 흰옷에 묻은 숙명적인 얼룩과 같은 것이다. 한 번 묻은 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일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거야. 입 밖에 내면 그건 거기서 끝나버려. 다시 몸에 깃들지 않아. 너는 딕 노스에게 한 일을 후회해. 그리고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정말로 후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 내가 딕 노스였다면 나는 네가 그처럼 간단히 후회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 입 밖에 내서 '몹쓸 짓을 했다'고 타인에게 말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그건 예의의 문제고, 절도의 문제야. 너는 그걸 배워야 해.


그리고 나는 그처럼 입바른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있는 인간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상대가 몇 살이든, 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나는 어떤 종류의 일은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쓸모없는 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이면 성실하게.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상상력이 없는 자들일수록 자기 합리화가 재빠르거든.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한 완벽한 귀였어.


영화는 너무 뻔하다 싶을 만큼 진부한 줄거리로 평범하게 진행되어갔다. 대사도 평범할 뿐만 아니라 음악도 평범했다. 타임캡슐에 넣어서 '평범'이라는 딱지를 부텨 땅에 묻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영화였다.


몸의 기능을 잘 파악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어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가 상실돼 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속 상실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어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게 되면, 나의 세계 인식 자체가 뒤흔들려 버린다.


나 자신과, 내가 연출하고 있는 나와의 격차가 어느 정도 이상 벌어지면 그런 일이 곧잘 일어난다구. 나는 그 격차를 이 눈으로 실제로 볼 수 있었어. 마치 지진이 일어나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진 것처럼, 그게 딱 벌어져 있는 거야. 깊고 어두운 구멍이야. 현기증이 날 만큼 깊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를 무의식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거야. 정신을 차려보면 무엇인가를 부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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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너무나도 거창하게 제목을 붙였다.)


오늘 아침에는 식사를 하고 나서 지난 번에 대책없이 많이 만들어 버려서 처치 곤란인 생쵸코를 이용해 핫쵸코를 만들어 마셨다. 180cc 가량의 우유를 냄비에 넣고 약한 불로 데운 뒤 생쵸코를 투하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초콜렛을 제법 많이 넣어 걸쭉하고 진-한 핫쵸코가 완성되었다. 근래 꽤나 집착하고 분노하는 '분말 핫쵸코'를 생각하며 "그래 이거야! 이거지!"라며 흥분했다.


재채기와 맑은 콧물, 밭은 기침, 미열, 부은 목. 감기 기운으로 흐물흐물한 몸을 집에서 보온용으로 입는 두꺼운 가디건으로 감싸고 부엌 모퉁이의 벽에 기대어 잔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핫쵸코를 마셨다. 뜨겁고 달달하면서도 쓰고 너무나도 진해서 빨리 마실 수 없는 이 음료는 갑자기 시간을 한 템포 느리게 흐르도록 만들어 주었다. 음식으로 인해 이렇게 놀라운 감상을 갖게 되는 것은 '에그타르트' 이후에 처음인 것 같다.


핫쵸코를 천천히 조금씩 마시면서 나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다. 대단지 아파트 한켠에 있는 집의 부엌이 아니라 낡고 어두운 전원의 코티지. 밖에선 함박눈이 많이 내려 온세상을 뒤덮고 있고 나는 지금 여러 겹의 담요와 천이 쌓여 있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다. 무릎에는 얇지만 따뜻한 담요를 덮고 있고 조금 두꺼워서 몸이 둔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스웨터와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눈 앞에는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다. 창문 틈으로 이따금씩 센 바람이 새어 들어올 때면 훅-하고 불길이 치솟고 그럴 때마다 내 얼굴에 열기가 불길처럼 훅-하고 느껴진다. 제법 무겁고 커다란 머그에 담은 아주 진-한 핫쵸코를 두손으로 받치고 천천히 마시고 있다. 내가 있는 바로 그 공간이 아니라 옆방이나 윗층쯤에서 음악이 들려 온다. 가사를 명확히 알아들을 순 없지만 리듬과 멜로디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장작이 타는 소리와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 목구멍으로 핫쵸코를 넘기는 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핫쵸코를 마실 때마다 이렇게 떠날 수 있다면 나는 매일 핫쵸코를 만들어 마실 것이다.
(그래 나는 미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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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콜렛 상자

주제없음 2008 / 2008. 11. 17. 20:52

방금 <무간도1>을 봤다. 양조위가 너무 멋져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아무래도 난 조금 아저씨 취향인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전에도 <중경삼림>이나 <해피투게더>, <2046> 등을 보면서 무척 꺅꺅대곤 했었지만 이번엔 뭔가 더 둔중한 느낌으로 쿵 ! 가슴에 내려 앉았다.

근데 불안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많은 것들, 탐닉했던 것들은 내가 그것의, 그 사람의 전부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고 흡입할수록 그만큼의 속도로 빠르게 닳아버린 것 같아서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네이버에 치기 시작하면. 누군가의 필모그래피를, 저작 리스트를, 디스코그래피를 뽑기 시작하면. 우리는 조만간 끝인걸 알게 되었기에 순간 양조위에 대한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그 조만간은 몇 주 정도로 짧을 수도, 몇 년으로 길 수도 있지만.

쵸콜렛 상자에서 가장 맛있는 건 아껴두는 방침을 세워야 할까. 허겁지겁 후딱후딱 먹어치우지 말고. 이상하게도 열렬히 사랑할수록 우리는 '당분간'이다. 그게 너무 이상하다. 오히려 그냥 괜찮고 나쁘지 않을 수록 우리는 '오래오래' 만나게 된다.

나를 '지나치게' 매료시킨 대상들은 언젠가 안녕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전부 알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하나 게걸스럽게 알아가고 추적하다보면 어느 순간 포만감에 뒤로 나동그라진다. "아 알 것 같아, 너에 대해서 나는 파악해버린 것 같아."라는 흡족함도 잠시. 이내 지루해지고 만다.

무엇일까. 누군가는 자기만 기댈 수 있다고 삐죽대는데 그걸 보고 어리다고 손가락질한 나야말로 끊임없이 미지와 신비만을 추구하는 어린아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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