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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올라온 글

미즈무라 미나에 <본격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폴 오스터 <hand to mouth> (한국어 <빵 굽는 타자기>)

김연수 <소설가의 일>

- 이건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앞부분 조금 읽고, 최근에 서점에서 훑어보기만 했다. 

김연수 문체는 어쩐지 적응이 안되어. 늘 들떠있는 것만 같은 기분. 


<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중 손홍규에 대해서 후배 작가가 쓴 거였는데 이름을 잊었다. 이것 역시 서점에 서서 읽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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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리틀포레스트 예고편을 보고 ‘리틀 포레스트’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일본판을 보았는데. 이걸 보고나니 한국판이 기대되지 않네. 샤방샤방 청춘드라마 만들어놓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 좋았다. 사람과 처음 만나서 이야기할 때 같은 느낌. 처음 만나자마자 엄청 개인적인 것들을 다 물어보거나 자기 얘기를 혼자서 다 하는 느낌이 아닌 것. 영화는 보통 허구 캐릭터의 삶을 관객에게 와앗 하고 전부 보여주는 편이다. 이 생각이 왜 들었냐면 이 영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이쪽저쪽 조그만 보여줘서 진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속도가 맞는 사람을 만난 느낌인지도 모른다. 자기 인생을 갖고 나한테 달려들지 않는 사람.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이 첫 장면도 너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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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사키 하나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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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밑줄을 칠 수 없는 책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소설 속 세계에 흠뻑 빠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미즈무라 미나에와 츠지 구니오의 필담에서 언급된 '청소년기에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축제로서의 책읽기'를 경험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재미있다거나 대단한 스토리텔러라는 생각은 해봤어도 작가가 똑똑하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읽고서는 작가가 아주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 때문인듯하다. 그리고 첫 소설과 두번째 소설, 세번째 소설이 나아가는 방식이 흥미로워서. 책을 미친듯이 읽고 나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보통은 조금 묵혀두는 편. 이 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복선들을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사소설>을 읽고 싶은데, <본격소설>이 2008년 초판 발행 이후 지금까지 초판본이 아주 레어하게 돌아다닌 것을 보면 미즈무라 미나에의 다른 책들이 번역 출간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역시 일본어 읽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순간. 






소설이란 사라져간 '시간'을 애도하고, 그럼으로써 지금 사라지고 있는 '시간'을 애도하며 아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한국어판 서문 중



어쩌다가 그 보물상자가 열리면 봉인된 '시간'이 그 혼란스러웠던 시대 고유의 그림자와 소리, 냄새와 더불어 어린 시절의 기억에만 깃드는 최상의 광휘와 함께 눈앞에 둥실 솟아오른다. 



일본에서 막 온 일본인은 백화점의 새 포장지로 감싼 것처럼 일본의 공기에 싸여 있는 법인데, 젊은데도 불구하고 지친 인상의 이 남자는 이미 정신이 이국의 어딘가에 침식되기 시작한 듯했다. 



도쿄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걷거나 레스토랑에 들어가거나 할 때마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용모들이 수려해졌구나, 저러면서 머리까지 절망적으로 텅 비어 있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하고 늘 내가 감탄하거나 저주하는 일본의 젊은 남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 뵌 적이 있었던가요?

- 아뇨. 

남자는 조금 수줍어하면서 웃었다. 

거기에는 젊은은 있었지만 뻔뻔함은 없었다. 



유스케는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 일본이 멀어져버렸어요. 



유스케가 갑자기 말을 이었다. 

- 미즈무라 선생님 책을 읽었습니다. 

- 네. 

- 두 권 다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 저는 대단히...

잠시 말을 찾다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가장 무난한 표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자동적으로 되풀이했다. 남자가 내 소설에 관심이 있어서 온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찾아오기까지 했으면 조금 더 자세한 말을 하는 것이 소설을 쓴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인사가 아닐까.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내 소설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잠시나마 불만을 느꼈던 것도 잊고, 그가 요즘 일본문학에 흥미가 없다는 것, 즉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새로운 소설가들의 이름을 늘어놓아 나의 무지함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할 우려가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일본 소설가뿐만 아니라 비서양 언어로 글을 쓰는 다른 소설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시도는 일본 근대문학의 큰 흐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큰 흐름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멀리서부터 '도쿄온도'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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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는 기본적으로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단가 형식의 기본이다. 따라서 짧은 단어에서 그 느낌을 해석해내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시형이기도 하다. 

- <시간이라는 추>에서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 문장에서의 '행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는 식의 영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메시지라는 말은 정말이지 친해지기 힘든 단어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신작 영화를 홍보할 때면 몇 번이나 그런 질문을 되풀이된다. 아, 곤란하다 곤란해... 애초에 내가 이 영화에 메시지란 걸 담았던가. 



"시는 메시지가 아니다. 메시지는 의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시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인 다나카와 슌타로 씨는 한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작품에 이야기할 만한 메시지라는 것이 포함돼 있다면, 그것은 만든 사람이 아닌 독자나 관객이 발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내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TV 다큐멘터리로 이 일을 시작한데다, 연기 경험이 별로 없는 모델이나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찍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작가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자유를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체념적인 태도, 그리고 그런 부자유스러움을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인다고 나 스스로는 분석한다. 




연출론을 깊이 파고들 수 없는 또다른 이유는, 도마 위에 오른 프로그램의 연출이 너무 치졸해, 어찌해도 연출론으로는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노다 마사아키 <상중에>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어린 시절, 아직 집에 냉장고가 없던 때의 일. "아이스크림 먹고 싶네"라는 말이 나오면 어머니에게 50엔을 받아들고 집에서 2분 거리에 위치한 잡화점으로 달려가, 하나에 10엔 하던 컵 아이스크림을 다섯 개 샀습니다. 벌써 40년도 더 된 일이라 컵 색깔이 파란색이었는지 노란색이었는지, 모리나가 표였는지 유키지루시 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손에 쥐었던 10엔짜리 동전의 감촉과, 잡화점 밖에 놓여 있던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열 때의 냉기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쇼난 '지가사키관' 여관


가고시마 명물 '가루칸'



영화 속에 그려진 날의 저날에도 다음날에도 그 사람들이 거기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관을 나온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줄거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고 싶게 하는 묘사. 그 때문에 연출도 각본도 편집도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장에서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무대에서는 그렇게나 가볍게 움직였는데, 대조적으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손이나 발, 눈조차도. 언제 움직이나 하고 가만히 응시했다. 카메라를 정면에 두고 클로즈업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라고 한마디. 그리고 또 히죽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면, 그건 아니다. 모든 것은 사소한 움직임과 움직임의 사이에서 표현된다. 대사와 대사 사이. 움직이기 전에 멈춰 있는 약간의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식으로 당황스러움과 친절함, 유머를 멋지게 나눠 연기한다. 깎아내고 깎아내지만, 그럼에도 정적이지 않다. 

(하시즈메 이사오에 대해)




대개 사람들은 화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배우가 영화의 주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주연은 화면에 잡히지 않을 때도 그 영화를 지배하는 사람이다. 좀 멋지지 않은가, 이런 말투. 대체 무엇을 지배하는가 하면, 그것은 영화의 톤이나 리듬이나 템포 등이다. 무슨 리듬이냐면, 대사와 액션과 감정과 때로는 편집의 리듬이다. 



소문대로 철도를 좋아했다. 인터뷰어가 전차의 매력에 대해 묻자 그의 한마디.

"나만의 것이 되지 않는 점이에요. 거기에 낭만이 있습니다."

(쿠루리의 기시다 시게루)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영화의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아이를 버린 어머니도 단죄하지 않는다"였다.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라는 게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이클 무어의 자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축제니까 배당금을 걸고 내기 대상으로 삼거나, 영화 평점의 별 개수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즐기는 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레이스'만으로 시야를 좁히면 영화제의 본질을 오인할 수 있다. 우열을 겨룬다는 직선적인 감각은 영화제에 참가하는 나의 마음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사실은 좀더 풍요롭고 복잡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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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르의 시나리오와 영화에서 대사의 비중은 자주 언급된다. 로메르는 대사를 흥미진진하고 영화적이라고 간주하며, 대사를 쓰는 것이 시나리오를 위한 시발점이 되는 개념을 찾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한다. 

(피오나 핸디사이드 서문)




늘 영화에 관심이 있었나요?

아뇨,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아주 늦게, 학생 시절에야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영화를 멸시했고 좋아하지 않았어요. 독서와 미술,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서는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죠. 연극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보러 간 적도 많지 않아요. 라신, 코르네유, 몰리에르 같은 프랑스 고전 희곡을 좋아했지만 보는 것보다 읽는 것을 좋아했죠. 영화는 시네마테크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무성영화들을 좋아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지만 단지 극장에 가는 것만으로 영화를 발견한 건 아니었어요. 



두 여자 사이에서 주저하는 남자라는 개념이 '도덕 시리즈'의 모든 영화들 간의 연결 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자는 사실 주저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그가 선택을 하고 마음을 먹은 바로 그 순간, 다른 여자가 등장해버린 겁니다. 어떤 종류의 갈등도 실제로는 없고, 그런 상황은 남자의 선택을 확고하게 해줄 뿐이에요. 일례로 <수집가>에서 남자는 단지 여자와 일주일을 지낸 후 떠납니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도 남자에게는 모험일 뿐, 한 여자와 다른 여자 사이에서 주저하지는 않아요. 만약 그가 모드와 관계를 맺었다면 일주일 지속된 후 끝났을 겁니다. 내 최근작에서도 주인공의 선택은 이미 끝났고 그는 결혼을 할 겁니다. 그가 모험을 즐긴다면 그건 모험 외에 아무것도 아닌 거죠. 


이 연작을 시작할 때 소재에 대해 정확한 개념들을 갖고 있었나요?

네, 오랫동안 마음속에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고, 연작을 시작했을 때 각 '이야기conte'의 주제가 뭐가 될지 알고 있었죠. 그러나 발전시키지 않은 상태였고, 아직 극히 희미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무엇보다 주안점을 둔 것은 검정과 하양, 빛과 그림자 사이의 대비를 탐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컬러란 모름지기 영화에 뭔가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흑백을 선호해요.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흑백은 일종의 기조, 통일성을 부여하며, 이는 컬러를 잘못 쓰는 것보다 영화에 훨씬 더 유용하거든요. 



'도덕 이야기'에서 '도덕'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는 뭔가요?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번역되기 힘든 '모럴리스트 moraliste 인간성을 탐구하는 사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럴(도덕/교훈)'이라는 말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모럴리스트'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을 의미해요. 마음 상태와 느낌에 관심을 갖죠. 예를 들어 18세기 파스칼이 모럴리스트였습니다. 특별히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 라브뤼에르나 라로슈푸코 같은 사람들을 일컬어 모럴리스트라고 하고, 스탈당 또한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묘사하므로 모럴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하지만 '모럴'은 또한 그들이 자신의 행동 동기, 이유들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들을 분석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 자체보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예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언어의 문제도 있어요. 난 대화, 스타일, 음질, 억양에 많은 중점을 두고 그것은 매우 중요해요. 프랑스어는 내 영화들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난 작가이기도 하며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작가로서 프랑스어는 내게 중요해요. 뭔가를 쓴 후에 다른 누군가에게 번역을 맡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영화의 저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난 프랑스에서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또 다른 예로 히치콕 같은 미국 감독들을 존경하지만 그들에게서 실제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만약 영향을 받았다면 그건 상당히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존경하는지는 말할 수 있으나, 영향력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각자의 반응은 유일하고 개인적이며 서로 달라야 합니다. 난 관객들이 서로 너무 가까이 앉지 않고 극장이 너무 꽉 차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모를 때 영화를 더 잘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각자 상이한 반응을 하게 되요. 그것이 획일화된 반응이 일어나는 극장보다 낫습니다. 난 대중과 함께 내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모두 같은 지점에서 웃으면 고통스러워요. 그렇게 작정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내가 단지 모두를 동시에 웃기려고 뭔가를 쓴 건 아니라는 거죠. 누군가 미소 짓는 건 괜찮지만 영화의 정확하게 똑같은 데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아마 내 영화들이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독서와 더 유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대 위의 뭔가를 보는 것보다 책처럼 읽히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죠. 그래서 집단적인 반응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어떤 소재가 관객에게 가장 어필할지를 계속 자문하는 대신, 동일한 소재를 여섯 번 다루는 것이 최선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죠. 여섯 번째가 되면 관객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나는 여전히 10년 전 나 자신을 위해 계획했던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해지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한 가지 아이디어를 계속 고집하면 결국 지지자들이 생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심지어 배급사조차도...... 독립된 한 편의 시나리오보다는 여섯 편으로 구성된 연작의 시나리오를 문제 삼거나 비판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내 작업은 연극과 같은 다른 형식의 엔터테인먼트보다는 소설(현재 영화가 바통을 이어받은 특정한 어떤 고전 스타일의 소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게 그것은 큰 의미가 있어요. 나는 영화가 이미 연극에서부터 나아간 것보다도 더 멀리 영화를 끌고 가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캐릭터들이 말이 많을지 모르지만 연극이 성립되려면 대사만으로는 안 돼요. 내 캐릭터들은 전혀 연극 속의 인물들처럼 말하지 않아요.(적어도 그들이 그렇지 않기를 바라죠.)



왜 '도덕 이야기'의 편수를 한정하셨나요?

일단 이야기 연작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것이 어디에선가 끝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에드거 앨런 포가 '기이한 이야기의 남자'로 회자되는 의미로 내가 '도덕 이야기의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판타지, 스릴러, 역사 소설도 쓸 수 있어요.(그리고 언젠가 원하면 만들 겁니다.) '도덕 이야기'는 내게 하나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주제의 변주인 거죠. 



계속해서 <수집자>의 보이스오프 장면들을 보면, 아드리앵이 매우 형식적인 18세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 반면 대사는 항상 매우 현대적인 스타일을 띠죠. 사고와 말 사이의 이분법을 암시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요?

...그러나 이분법은 확실히 의도된 겁니다. 옳든 그르든 나는 톤에서 그런 차이가 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프레임워크는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감독님이 선택한 것 이외의 세팅에서 인물들을 상상할 수는 없거든요. 인물들과 세팅을 절대 분리하지 않으시더군요. 

정확하게 그래요. 그리고 네스토르 알멘드로스의 카메라워크가 인물들을 풍경과 연결하는 데 크게 기여하죠. 윤곽(아웃라인)보다는 형상을 부각하는 것과(모델링) 더 관련이 많은 카메라워크 유형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빛을 사용하는 화가들, 대상들 각각을 고립시키기보다는 빛에 빠뜨리는 화가들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대상을 분리하고 에워싸고 일종의 독립체로 만들어버리는 초현실주의적 트릭을 싫어해요. 내가 선호하는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터너 혹은 세잔입니다. 



그녀(주주)는 자신의 개인적인 색을 더했고, 바로 이런 점, 즉 존재하는 것들과 우리가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조립하는 것이 영화에서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에요. 



그들은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로워지려고 시도하지 않아요. 개인과 사회 간에 마찰이 없어요. 갈등은 오히려 캐릭터의 자유와 그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규칙 사이에 더 존재합니다. 프레데리크(<하오의 연정>에 등장하는 남편)은 좋은 남편이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클로에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고. 어떤 사회라도 원칙(그것이 무엇이든)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소재는 유효합니다.



"로메르는 손쉬운 아름다움을 피하면서도 모든 숏이 아름답기를 원한다"



내 최근 영화들과 아마 심지어 첫 영화에서도 캐릭터들이 자신이 사는 장소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들은 스스로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그곳을 좋아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압니다. <비행사의 아내>의 경우가 그렇고, 폴린느와 루이즈도 마찬가지예요. 이는 유동성과 고정성 간의 갈등입니다.



안정과 불안정, 부동과 변화가 있습니다. <만원의 밤>의 루이즈는 어느 순간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내 차기작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로 떠나고 싶어 할 거예요. 그녀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녹색 광선>의 여주인공이 염소자리라는 사실은 그녀 스스로에게 매우 중요하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의 '파란 시간l'heure bleue' 섹션은 점성술보다는 기상학에 더 많이 기대고 있고요. 그리고 <만월의 밤>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를 영화에서 일종의 게임으로 보시는지, 아니면 정말로 감독님의 존재론적 관점의 일부인지요? '에리크 로메르는 가벼운 영화를 만들 때조차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세계관, 우주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만한 사실을 담보한다'라는 의미인가요?

상당히 복잡한 문제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질문하셨으니 답할 수 있겠네요. 점성술을 그다지 믿지 않아요. 그것은 내 영화들에서 18세기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교적 초자연성과 유사한 역할을 합니다. ... 그러나 동시에 나는 게임에서처럼 초월성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요. 별이라는 테마를 내가 사용하는 방식은 이와 같죠. 그것을 믿지는 않지만 회의적이지도 않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믿는 바를 내가 믿지는 않더라도.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럴 욕망이 있고, 심지어 가장 최근 영화에서도 내가 원하는 바의 한계점까지 가봤습니다. 



그러나 흑백의 결정은 클레르몽페랑과 그곳 하면 떠오른 뭔가와 관련이 있어요. 클레르몽페랑은 검은 도시이며, 그 검정은 컬러필름을 사용했다면 노랗거나 보라로 보였을 겁니다. 나는 또한 영상에 일종의 얀세니즘적(인간의 구원이 개인의 선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은총과 선택으로만 가능하다는 엄격한 가톨릭 교리) 특징인 단순함을 부여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컬러의 디테일에 빠져 길을 잃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한 영화 안에는 어느 정도 통일된 색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통일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영화가 연극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어요. 연극에서는 완벽한 조화, 극도로 조화로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부수적인 색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어떤 부조화도 없이 너무 완벽하면 지나치게 인공적이 돼버려요. 



이 영화는 다소 삽화적인 구성을 띱니다. 이야기 한편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고, 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야기들이 굴러갑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요. 심지어 이고르가 도착할 때도 영화는 진정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나중에야 제공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영화가 하나의 긴 전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인 도입, 전개, 결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아요. 내 예전 영화들을 포함해서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각 액션의 조각이 다른 조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나는 약간 다른 무엇인가를 시도했고, 그것이 조금 지나쳐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런 점이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에요. ... 나는 지나치게 빨리 소재로 진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이미지와 스크린상의 역동성의 관점에서, 침실에서 끝낼 수는 없었고 밖으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점이 또한 약간의 음악이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해요. 끝났다는 신호가 되는 것이죠. 



내가 '도덕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때 '희극과 격언'에 속하는 몇 편이 잉태 중이었음을 아실 겁니다. 실제로 그것들을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요. 마찬가지로, '희극과 격언'을 만들던 중에 '사계절 이야기'의 일부를 구상했습니다. 나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면에서 안티테제를 통해 전개해나가는 것을 좋아해요. 예를 들어 <겨울 이야기>를 위해서는 <봄 이야기>의 이야기와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한 남자와 세 여자 대신, 한 여자와 세 남자)이면서 동시에 <녹색 광선>의 이야기에도 반대되는 이야기를 희미하게 구상했습니다. 왜냐하면 <녹색 광선>에서는 한 여자가 남자를 못 찾는 모양새인데, 여기서는 한 여자가 세 남자 중 못 골라서 문제거든요. 그 후 1980년대 초반 BBC가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본 후, 사랑받는 여인의 귀환으로 내용을 혼동해서 기억하고 있었죠. .. 바로 그때 사랑받던 남자의 귀환을 영화화하고, 그것을 셰익스피어를 참조하여 '겨울 이야기'라고 부르겠다는 생각을 했죠. '겨울 이야기'라는 아이디어가 생기고 나자 '사계절 이야기'라고 부를 연작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따라서 <봄 이야기>를 구상하기 전에 <겨울 이야기>를 생각해낸 셈이지만 당시에는 그걸 언급하지 않았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막상스, 로이크, 심지어 펠리시조차 감동적이면서 비정하고, 짜증나면서도 사랑스럽습니다. 

내 아리스토텔레스적 측면이죠! 비극의 인물들은 전적으로 선하거나 전적으로 악해서도, 전적으로 유죄이거나 전적으로 무죄여서도 안 돼요. 예를 들어 위대한 할리우드 서부극들은 이 고전적 드라마트루기의 법칙을 준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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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ngth + core

부자피다사나에서 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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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기록광/메모 / 2018. 2. 15. 03:04

1.
일월.
애들과 제주
yj, jh과 구파발
jh, ch와 혜화
이월.
그림전시 오프닝 (yj, ch)
졸준위
yj, jh과 서촌
u, su, so와 혜화

넷이서는 제주 이후 한 번도 못만났다는 것이 놀라워


2.
그러고보니 이 블로그도 십년이다.
3631개의 글이 있다.
이곳을 통해 연락하거나
연락하다가 실제로 만나거나
우연히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있었다.

최근에는 인스타 추천에
여기서 만난 최초의 친구를 보았고 팔로우를 했다.
사진으로 그 사람 얼굴을 처음 보았고
며칠 뒤 서촌 카페에서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다가가 ‘저 하마곰이에요’라고 말한다 한들
기억할까 싶기도 하고
너무 크리피하기 때문에 그만뒀다.


3.
나는 사람을 잘,
나는 사람에게 쉽게 연락을 못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면이 있기 때문에
또 쉽게 친해지지도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또 연을 맺으면 꽤 오래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서서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4.
어디서 나랑 속도가 비슷하면서
좋아하는 것들도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그런 거.

근데 그게 정말 비슷해? 라고 생각하던 나를
생각하면 섣불리 말을 건넬 수 없는 거
하지만 또 그래도 뭐 어때 하는 거.



5.
요즘 작업 안하는 거 빼고 세상 행복한데.
건강하게 삼시세끼 요리해서 챙겨먹고
책 읽고 낮잠 자고 편지 쓰고
요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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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숩타 쿠르마사나 sh샘이 해주는 방법: 배를 당기고, 가슴을 내밀고, 어깨에 힘을 빼서 툭 떨어뜨려, 팔을 쭉 당겨 등 뒤로 가게끔. 오늘도 여전히 잡지는 못했지만 어제 선생님이 해주셨던 것을 생각하며 차근히 해보니 그래도 조금 나은 것 같다. 요즘은 혼자서 하면 발이 한없이 넓게 벌어지는데 오늘은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발만큼은 예전 정도 수준으로. 

+ 나는 숩타를 할 때면 다리가 너무너무너무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도무지 이동을 시킬 수가 없는데 역시 하체가 너무 튼실해서 그런 것인가 싶다가도 키노샘을 보면 키노샘도 한 허벅지 하시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가르바핀다도 사실 그렇지. 


마리차사나d : 오늘 양쪽 다 잡았다. 여전히 이 몸통이 로테이팅하는 것은 아직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전처럼 쉽게 슥-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제인가 그제 hj샘이 돌리는 몸통의 바깥쪽만이 아니라 안쪽도 돌리는 느낌을 핸즈온으로 알려주셨는데 오늘 그걸 생각하며 하니 잘 잡혔다. (오른쪽할 때 몸통의 왼쪽, 왼쪽할 때 몸통의 오른쪽까지 깊게 돌리는 것.)


자누a : 이것도 hj샘이 교정해주신 것인데 새로운 차원의 느낌. 몸통이 거의 정면이 되도록 돌리는 건데 자누할 때 이걸 열심히 하면 마리차사나 할 때도 도움이 되는 듯하다. 오른쪽할 때는 몸통의 왼쪽 부분은 누르고 오른쪽은 오히려 든다는 느낌으로 몸통 전체를 돌린다. 하고 나면 처음 느껴보는 요상한 뻐근함 같은 게 몸통에 퍼지는데, 좋다. 자누b할 때도, c할 때도 적용하여 하니 관성적으로 하던 자누가 재미있어졌다. 

+ 이것은 우티타 파르브리타 파르스바코나사나를 할 때도 로테이팅을 열심히 하면 이후의 아사나들에서 좋은 것 같다. 이렇게 서로 다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은가... 


요즘 수련 처음부터 끝까지 차투랑가 내려갈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힘 빠지지도 않고, 배를 대지도 않고 잘 내려가는 것 같다. 힘이 생겼나보다 하고 기뻐하는 중. 점프쓰루를 연습할 때 조금씩 더 팔에 무게 중심을 두고 들어오려고 하니 아주아주 살짝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다시 수련 시작한 이래로 스탠딩에서

우티타하스타파당구쉬타사나, 아르다밧다 같은 것은 너무 처참할 정도다. 무릎과 발목이 불안정해서 흔들흔들. 숩타파당구쉬타사나도 전처럼 다리가 쭉쭉 찢어지지 않는다. (머리를 터치하는 게 어렵다.) 우티타 하스타 파당구쉬타사나의 어려움은 그것에서도 오는듯. 


부자피다사나, 가르바핀다 : 말도 안됨. 이 아사나들을 처음으로 받았을 때의 상태로 돌아감. ..



최근 통계?로는 

수리야나마스카라a,b = 10분

스탠딩= 15분


피니싱=15분?

도합 사바사나 전까지 정확히 80분 걸린다. 



+

아무튼 고관절 스트레칭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무릎을 위해서도. 숩타쿠르마사나 같은 아사나를 위해서도. 




++ 

그저께부터인가 무릎이 다시 아프다. 수련할 때도 신경쓰일 정도로. 데이터를 살펴보니 일요일에 7500걸음 정도, 어제는 11000걸음 정도 걸었기 때문인가. 체중은 딱히 증가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뭘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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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수련수련 / 2018. 2. 4. 11:28

2017년 8월 - 온몸이 너무 아파서 불성실하게 수련. 왼무릎이 아파진 것이 가장 큰 계기였고 그 전부터 아팠던 오른무릎, 연초부터 맛이 간 왼쇄골과 왼어깨, 왼손목도 계속 아팠다. 물론 양발목도 회복 안된 상태. 


9월 26일 - 일본에 간 김에 다시 열심히 해보고자 했으나 딱 하루 셀프수련하고 접음. 


11월 7일, 8일 - 선생님에게 호기롭게 저 이제 바쁜 거 다 끝나서 매일 나올거라고 해놓고 8일 밤에 술을 많이 마셔 9일부터 안감. 그 다음주에는 감기에 걸려 안감. 그 이후엔 그냥 안감......


1월 16일 다시 수련 시작. 


17일이 마침 문데이였고, 그무렵 마침 레이디스 홀리데이에 걸렸고, 몸은 오랜만에 하는 수련으로 근육통으로 만신창이. 

보름 정도 지나니까 많은 아사나들과 유연성이 돌아왔다. 점프백 점프쓰루도 제대로는 여전히 못하지만(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뭐..) 마지막으로 수련하던 때의 상태로는 돌아왔다. 하지만 늘 자랑?으로 여기던 마리차사나d가 전처럼 잘 안되어 말썽이고, 부자피다사나/숩타/가르바 등은 말도 안되게 퇴보한 상태다. 


몸의 모든 부위는 여전히 아프다. 


수련 재시작 후 3일째 되던 날인가는 처음으로 오른쪽어깨 통증이 심해 겁을 먹었었다. 차투랑가를 너무 무리해서 하다가 근육통이 생겼던 것인데 유투브 좀 찾아보고 마사지 해주고 그 다음날 조심하면서 수련하니 다다음날엔 말짱해졌다. 아주아주 다행.


2016년 7월 선생님이랑 수련 시작한 이래, 

2016.7-12 (이 사이에 선생님이 한달인가 두달인가 마이솔 다녀 오셨었고)

2017.1-3 내가 일본에 있었고. 

2017.4-5 선생님이 네덜란드에.

2017.6 내가 미국에.

2017.8 내가 몸이 안 좋아 듬성듬성

2017.9-12 쉼

2018.1-  지금인데 이렇게 놓고 보니 선생님이랑 그닥 뭐 수련한 날들이 거의 없네...


그리고 2월 중순부터 다시 3주간 내가 자리를 비운다.

나의 프라이머리는 언제 끝날까. 드롭백은 언제 시켜주실까. 오래 쉬고 놀았으면서 진도 욕심은 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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